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실리오스 2세 (문단 편집) == 제국의 [[중흥]]을 이끌다 == || [youtube(xfEV40W7bPM,width=100%)] || ||<:>월 단위를 기준으로 한 바실리오스 2세 시대의 영토.[br]바르다스 포카스의 내란이 터지자마자(0분 59초) 아나톨리아가 전부 반군 수중에 들어가는 부분이 눈에 띈다. || ||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800px-Map_Byzantine_Empire_1025-fr.svg.png|width=100%]]|| ||<:>바실리오스 2세 치하 최대 강역. || 두 차례의 반란을 거치며 바실리오스의 성격은 판이하게 바뀌었다. 본래 탐욕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성격은 내전 이후 모든 욕망이 죽어버린 듯 했다. 그가 한평생 독신 생활을 한 유일한 황제가 된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보는 학자도 있다. [[https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3571544&cid=59014&categoryId=59014|네이버 캐스트에서는 '''전설로나마 남아 있는 스캔들조차 없다''']]고 써놓았다. 심지어 상단의 초상화에도 혼자만 있다.[* 이런 이유로 서구권에선 그가 [[동성애자]]가 아닌가? 하는 의혹도 있는 듯하다. 다만 그가 남성을 좋아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. 어찌 보면 [[무성애자]]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지만, 젊었을 때에는 여자들 꽁무니 쫓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는 기록도 있다. 종합해 봤을 때, 반란으로 인해서 사람이 많이 바뀐 듯.] 일찍이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불가리아에게 참패했던 바실리오스는 당시의 패전을 결코 잊지 않았다. 그는 '''반드시 불가리아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했고, 결국 그 맹세를 지켰다.''' 내전이 끝난 후, 바실리오스는 복수를 위해 불가리아를 재침공할 작정이었다. 그러나 995년 알레포와 안티오키아가 이집트의 [[파티마 왕조]][* 당시 기세를 떨치던 강국이라 오랫동안 로마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.] 손에 함락당하기 직전이라는 [[안티오키아]] 총독의 급보를 받았기에, 황제는 불가리아 정벌을 단념하고 [[시리아]]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다. 바실리오스는 전군에 노새를 지급해 최소 석 달은 걸릴 원정길을 빠르게 주파했고, 불과 '''16일''' 만에 알레포에 16,000여 명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. 파티마 왕조는 패배하였고, 황제는 이참에 기세를 몰아 에메사와 트리폴리까지 밀고 내려갔다. 아쉽게도 트리폴리는 함락시키지 못했지만, 황제는 만족하며 귀환길에 올랐다. 이것으로 한동안 파티마 왕조는 로마 제국에 도전하지 못할 터였다.[* 이때 이집트 군의 침공에 어리버리하게 대처한 안티오키아 총독 미하일 부르치스(젊은 시절 니키포로스의 시리아 원정 당시 가장 먼저 안티오키아 성벽을 용감히 돌파한 공으로 총독까지 출세한 인물이지만, 이 무렵에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다.)를 해임하고 용감하게 싸운 젊은 군인을 새 총독으로 임명했다. 그가 바로 그는 후기 동로마 역사에서 지겹도록 언급되는 달라시노스 가문의 선조, 다미아노스 달라시노스였다.(팔레올로고스 가문은 11세기 후반에야 기록에 등장한다. 주목할 만한 기록은 [[디라히온 전투]]에서 등장). 그리고 된통당한 파티마 왕조는 [[예루살렘]]의 [[성묘 교회]]를 부수면서 엉뚱한 곳에 [[화풀이]]한다.] 귀환하던 도중 바실리오스는 소아시아의 유지 에브마티오스 말리노스에게 대접을 받게 되었다. 황제에 버금가는 부귀를 누리는 말리노스의 연회 내내 그는 조용히 있었다. > 짐은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허구한 날 (제국의 테마들을 가로질러 원정길에 오를 때마다) 탐욕과 불법 행위가 자행되는 것을 똑똑히 목도했다. '''토지를 불리고 가난한 백성의 재산을 제 것인 양 부당하게 떵떵거리는 세력가들의 땅은 몰수하는 것이 마땅하다.''' > ----- > 996년 바실리오스 2세의 칙령[* 주디스 헤린의 『비잔티움』, 425쪽]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그는 소아시아 귀족들에게 치명타를 날릴 새로운 칙령을 공포했다. 이 칙령은 그동안 토호들이 강탈한 농민들의 토지를[* 당시 동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고리대금업으로 농민들의 땅을 뺴앗는일이 흔했다. 심지어 고리대금업으로 빼앗지 못하면 협박과 강압으로 빼앗기까지 했다.] 무상으로 반환하라는 것이었다. 물론 귀족들 또한 호구가 아닌지라 가만히 있지 않았다.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라는 귀족들의 항의에, 바실리오스는 '''[[아우구스투스]] 때에 그대의 조상이 이 땅을 받았음을 증명한다면 소유를 인정하겠다'''고 맞받아쳤다. 고대 로마로부터 면면히 이어왔다는 계승 의식이 잘 드러나는 말. 아우구스투스가 묻혀 있는 로마 시 외곽의 [[아우구스투스 영묘]]가 제국령에서 벗어난 지 200년도 넘은 시점에 이런 말을 하는 건 당연히 '''[[까라면 까]]'''라는 뜻이었다. 이 칙령으로 말리노스는 정의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으로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고, 많은 귀족들이 몰락했다. 또한 바실리오스 2세는 토지 반환은 물론이고,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농민들의 미납된 조세를 내도록 했다.[* 이전에 농민들의 미납된 조세를 귀족들은 내지않고 다른 농민들이 내게하는 횡포를 부렸다.] 그리고 당시 교회로의 기증을 통해 봉건 영주화 되어가고 있던 수도원의 토지 소유를 억제하려고 했다.[* 이는 당대 서유럽에서도 일어난 일로, 교회권의 성장에 기여하여 그 유명한 [[카노사의 굴욕]]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었다.] 당연히 성직자들도 반발하며 소아시아 지역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고, 그는 한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러야 했다. 이는 물론 10세기 들어 눈에 띄게 강력해진 아나톨리아 지방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